[림일 작가의 통일인터뷰] - 허 철 원코리아미디컴 대표 -
"자연, 자유의 바람보다 ‘한풍’이 낫다"
대한민국의 대중문화 요소가 외국에서 유행하는 현상을 ‘한류’(韓流)라고 한다. 1990년대 말에 중국, 일본, 동남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한류의 기본 구성체는 한국의 대중연예인들이 외국현지에서 공연하는 모습도 되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미디어(영상) 매체이다. 파급력이 크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류는 중국 동북3성을 지나 북한의 접경지역에도 흘러 들어가고 있다. 최근에 입국하는 탈북민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북한에서 당국의 엄포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드라마나 음악 등을 몰래 접했다는 사례가 적지 않다.
북한에서 직간접적으로 ‘한류’를 접했던 탈북민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아! 썩어빠진 남조선이 바로 한국이구나. 정말 잘 사는 나라이네” 하는 정도의 인식에서 끝난 것이다. 분명 통일을 위해서 북한주민들의 인식개선이 필요하다. 북한당국의 거짓선전대로 남한이 나쁘지 않고 좋다는 것을 꾸준히 알려줘야 한다.
3만 탈북민사회에는 영화감독, 영상물제작자 등 미디어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다소 있으며 그들이 만든 영화와 영상물도 제법 있다. 물론 소재는 북한이고 시청자는 남한 국민에게 맞춰있다. 허나 냉정하게 말하면 대박 난 영상물은 없다.
기대와 관심을 가졌던 북한관련 영상물이라도 실제 보고나서 “그냥 그렇네”로 평가하기가 일쑤다. 현실의 문제점을 깊이 통찰하고 새로운 방법으로 대안을 모색하는 미디어전문가가 있다. 그가 허 철 원코리아미디컴 대표이다. 얼마 전 서울 양천구에 소재한 본 단체 사무실을 방문하여 허 철 대표와 마주 앉았다.
- 고향이 어디인가?
1963년 량강도 혜산 태생이다. 량강도청(인민위원회) 소재지인 혜산은 이웃나라 중국과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인구 20만의 도시이다. 1979년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인민군에 입대하여 10년 군사복무를 마치고 89년에 제대하였다. 다행히 운이 좋게도 양강도무역회사 지도원으로 배치 받았다.
- 어떤 일을 하였나?
중국과 무역을 했다. 동구권 사회주의가 붕괴한 1990년대 들어서며 북한당국은 외화보유에 혈안이 되었다. 하여 외화벌이를 각 단위에서 자체로 하라는 방침이 내려졌고 지방당, 권력기관은 산하에 관련사업소를 만들었다. 당시 외화벌이 일군들은 대부분 보위부, 안전부 등이 뒤를 봐주기에 권세가 높았다. 일본의 중고차를 들여와 2~3배의 가격을 붙여 중국의 지방에 파는 장사를 하였다.
- 탈북을 하게 된 이유와 시기는
당국의 무역허가증(도강증)을 받고 1년에 10회 이상 중국을 드나들며 자동차 밀매장사를 했으니 자연스럽게 세상 실정에 눈을 떴다. 내가 노동당에서 받았던 ‘썩어빠진 남조선 실태 교육’이 모두 가짜이며 고향에서 당과 수령에게 충성했던 10년의 군사복무, 국가에 헌신했던 사회생활 등이 허망했음을 느꼈다.
오로지 수령 한 사람을 위해 노예처럼 충성하며 살았던 나 자신이 미웠다. 아무리 봐도 북한에는 미래가 없어 보였고 더욱이 살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으니 아내를 데리고 1997년 2월 탈북을 감행했다.
- 중국에서 어떻게 보냈나?
처음으로 간 곳은 연길이었다. 조선족이 많이 사는 지역이기에 그 쪽을 선택했으며 그곳에서 아내와 함께 과수원 일을 2년간 하였다. 이후 신변안전이 불안하여 청도로 이주하여 한국식품회사에 취직하여 3년간 일을 했다. 그래도 탈북자의 신분은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도 매서운 중국공안의 검거가 있었으니 도저히 안 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이후 몽골을 거쳐 지난 2002년 한국에 입국했다.
- 남한에 와서 처음 무슨 일을 했나?
하나원을 나와서 배정받은 주거지는 부산이었다. 먹고는 살아야겠는데 무슨 일을 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북한에서 배운 것도 없고 권력기관의 보호 아래 했던 ‘밀수업’은 더욱 하고 싶지 않았다. 당시 2002한일월드컵을 계기로 한류가 최절정기에 올랐던 시기이며 미디어산업에서 일하고 싶은 생각이 불쑥 들었다.
- 구체적으로 말해준다면...
40세라는 늦은 나이에 대학공부를 한다는 것이 선뜻 내키지 않았다. 그 대신 영상촬영기술을 배워 미디어제작자가 되고 싶었다. 그리하여 부산에 있는 모 영상전문학원에서 1년간 머리를 싸매고 영상촬영, 편집기술, 구성연출 등 전문지식 공부를 하였다. 이후 부산KBS, 울산KBS, MBC부산지국 등에서 3년간 인턴직원으로 일을 하였으며 이후 ‘하나영상’ 이라는 영상제작업체를 설립하였다.
- 그동안 만든 작품은?
2005년 9월 다큐 ‘뿌리’(부산 시네마테크영화제 출품작당선, 각본·감독·촬영), 2007년 11월 단편영화 ‘리즈헌트’(촬영감독), 2007년 12월 단편시나리오 ‘파편’(드라마, 시나리오 영상작가 교육원 창작상), 2014년 7월 KBS남북의 창 ‘광복70주년특선집’, 2015년 10월 상록수영화제 단편 ‘착한정착’ 입상 등이 있다.
2007년 서울에 올라와 문화관광부 공채시험을 봐서 프로듀서로 임명되어 문화관광부 홍보PD로 2년간 일을 했다. 주로 했던 일은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관, 고궁, 국가유적지 등에 대한 홍보영상물 제작이었다.
- 탈북민행사 영상취재를 많이 하던데
영상도 하나의 기록수단이다. 이 분야도 배고픈 직업이다. 글쎄 작가 앞에서 이렇게 말하면 실례겠지만, 요즘 사람들은 책보다는 영상을 더 많이 접한다. 사람은 구독(시청)력이 한 계가 있기에 어느 정도의 안구피로가 쌓이면 힘들어한다. 우리 탈북민들은 사명감으로 일을 해야 역사에 떳떳하다고 본다. 후대들을 위해서라도 탈북과 정착, 통일운동의 역사는 반드시 기록해놓아야 한다.
- 요즘 새 사업을 준비 중인 걸로 안다.
그동안 각종 기업체 홍보영상을 비롯하여 정부의 통일대북정책, 탈북민사회행사 등을 수많은 영상물에 담아 제작하였다. 이제 영화를 준비하려고 한다. 기존에 여러 탈북민 출신 감독들이 만든 영화도 여러 편 있으나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문제는 남한관객을 대상으로 북한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 자세히 설명해준다면...
남한의 관객에게 북한 이야기를 리얼하게 해주는 것은 맞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재가 남한 것이라는 점이다. 역설적인 착안으로 새롭게 시도하려고 한다. 이를테면 남한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에피소드를 북한주민들의 생활에 옮겨놓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류의 열풍’을 미지의 땅, 북한에 은밀하게 불어넣는 취지다. 그래서 영화제목이 ‘한풍’(한류열풍의 약자)이다. 지금은 제작준비 중이다.
- 어떤 내용인가?
영화 ‘한풍’은 북한 국경경비대 25여단(량강도 혜산시 주둔) 국경초소군인들과 마을처녀들의 재밌는 일상을 코믹하게 그린 영화이다. 북한식 유머와 남한식 개그를 적정한 비율로 섞었다. 한류를 통한 남한의 대중문화와 가전제품을 통해 또 다른 세계 대한민국에 대한 동경이 북한주민들에게 싹트고 있음을 알려준다.
지금껏 북한의 공산체제를 무너뜨리려고 과거 햇볕정책도 써보고 강경압박 정책도 써보았으나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제는 자연과 자유의 바람도 아닌 한류의 열풍으로 통일열기를 북한에 불어넣자는 것이다.
- 예감이 어떤가?
나쁘지 않다. 이 영화는 시나리오 집필, 연출, 촬영 등을 전부 내가 했다. 배역도 탈북민이다. 어쩌면 100% 탈북민이 만든 영화라고 할 수 있으며 다소 의아한 느낌도 들겠지만 역설적으로 독특한 브랜드라고 본다. 탈북민도 1000만 관객 대박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다.
- 대학공부를 안 했음에도 성공했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일을 오늘까지 묵묵히 해왔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엊그제 같았는데 이 손에 카메라를 잡은 지 벌써 15년째이다. 누가 보건 말건 알아주던 말든 10년 이상 한 가지 일을 꾸준하게 하다 보니 주변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격려해주는 사람들이 생기더라. 요즘 대학졸업생 수십 만 명이 백수시대이다. 하늘의 별따기 마냥 취업고생시대에 대학공부가 꼭 필요할까 말이다.
- 후배 탈북민들에게 한마디 하면...
기회는 노력하고 준비하는 자에게만 오는 법이다.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절대 오지 않는다. 남한은 자기가 노력하면 정말 살기 좋은 세상이지만 남의 구제로 살려면 진짜 힘든 세상이다. 사람이 사지가 멀쩡하다면 굳이 힘든 세상에서 살 필요가 있겠나? 행복은 어디 멀리에도 아닌 각자 모두의 마음속에 있다.








